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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산악인, 악마의 성벽에 오르다(13)

cj8848 2009. 1. 26. 00:13

 





[OSEN=탈레이사가르(인도), 박승현 기자] “형, 텐트 ⅓이 밀렸는데요”.

8월 30일 저녁이었다. 이날 오전 ABC를 출발, 탈레이사가르 캠프1으로 향했던 여동은 등반대장으로부터 ABC로 무전이 날아들었다.

순간 ABC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다음 공격조인 구은수 부대장, 유상범 대원을 비롯해 서우석 기술위원, 서선화 대원이 지원을 위해 베이스캠프에서 ABC로 올라와 있었다. 여기에 전체적인 상황파악을 위해 박희영 원정대장도 ABC에 있었다.

텐트의 ⅓을 밀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눈이었다. 캠프1에 도착한 대원들은 준비해간 고소전용 알파미를 주식으로 막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때 눈이 텐트로 밀려 들었다. 소규모로 쏟아지는 스노우샤워가 아니었다. 눈사태였다.

그럴만도했다. 이날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전날 저녁 때 내리다 그치는가 싶었던 눈은 새벽녘부터 다시 줄기차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베이스캠프에도 원정 시작 후 처음으로 눈이 내렸다.

눈을 맞으면서도 해발 4900m ABC를 출발했던 대원들은 결국 당초 목적지까지 다 가지는 못했다. 여병은 등반대장과 윤여춘 대원은 해발 5700m의 캠프2까지 전진하고 김옥경, 김형수, 한동익 대원은 해발 5400m 캠프1에 머물 예정이었다. 하지만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이 대원들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하는 수 없이 다섯 명의 대원은 캠프1에서 이날 밤을 지내기로 했다. 눈 때문에 주저 앉은 텐트를 다시 세우고 야영을 준비했지만 이마저도 눈에 위협을 받았다.

ABC에 있던 박희영 대장과 서우석 기술위원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원래 캠프1은 눈사태 위험지역에서 벗어난 곳에 설치 돼 있었다. 거기에 탈레이사가르 북벽은 눈사태가 날 확률이 적은 곳이다. 지형적인 이유 때문이다. 워낙 북벽의 경사가 급하다 보니 눈이 오는대로 떨어져나가 쌓여있을 틈이 없다. 이 때문에 소규모의 스노우 샤워는 빈발하지만 눈사태는 다른 히말라야의 고산에 비해 일어날 확률이 적다. 그럼에는 이날 밤은 상황이 달랐다. 벌써 캠프1까지 밀려 들어올 정도인 데다 눈은 그칠 생각도 하지 않고 줄기차게 내렸다.

마침내 박희영 대장은 무전으로 여병은 등반대장을 불렀다. “캠프1 텐트 폴을 모두 빼놓아라. 가능한 장비는 대원들이 휴대하되 남는 것은 텐트천 안에 안전하게 고정시켜라. 그리고 신속히 철수하라”. 텐트를 그대로 둘 경우 쌓이는 눈에 파손될 것을 우려, 텐트 폴을 모두 빼도록 한 것이다.

이런 지시가 내려가는 동안 ABC도 눈 때문에 한바탕 난리를 치러야 했다. 오후 4시께 ABC에 도착한 구은수 부대장이 텐트 문을 열자 텐트가 힘없이 주저 앉았다. 캠프1으로 이동한 대원들이 ABC를 비운 동안 텐트에 쌓인 눈의 압력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ABC는 내부에 다시 3인용 침실 3개를 수용할 수 있는 대형텐트 한 동과 4인용 텐트 한 동으로 구성돼 있다. 그 중 대형 텐트가 눈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 앉았다.

ABC에 도착한 대원들은 텐트를 바로 세우고 저녁준비를 했다. 이 사이에도 쉼 없이 텐트 위에 쌓이는 눈을 털어내고 텐트 주위의 눈을 치워야 했다.

철수 명령이 떨어진 뒤 한 시간 반쯤 됐을까. 김형수 대원으로부터 무전이 왔다. “형 새집이 새집이 아니예요”. 새집은 해발 5200m에 대원들이 설치 해 놓은 장비 데포지점이다. 텐트 한 동을 설치하고 이 곳에 필요한 장비를 넣어두었다. 새집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2002년 브리구판스 원정 때 부터였다. 이 때는 텐트 플라이만으로 데포 장비를 보호해 놓았는데 난데없이 새들이 날아와 살았다. 이때부터 서울시산악조난구조대는 해외원정 때 장비 데포지점을 새집으로 부르고 있다.

김형수 대원이 새집이 아니라고 한 것은 새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텐트 일부가 눈 때문에 찢어져 있었던 것이다. 헌집이 됐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찢어진 곳이 출입구 쪽인 것이 다행이었다.

박희영 대장과 서우석 기술위원은 그래도 캠프1에서 하산한 대원들이 새집에 머물도록 했다. ABC까지 하산할 경우 시간도 만만치 않게 소요될 뿐 더러 무엇보다도 3개나 버티고 있는 크레바스가 문제였다. 대원들이 충분히 크레바스의 위치를 숙지하고 있다고 해도 눈으로 인해 전부 덮혀 있을 것이 뻔했고 추가적인 눈사태도 우려됐다. 박희영 대장은 “비좁더라도 새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라. 교대로 불침번을 서면서 눈이 내리는 상황을 체크하고 텐트에 눈이 쌓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라”고 지시를 내렸다.

일단 캠프1에 있던 대원들의 안전지대 철수는 성공적으로 이뤄졌지만 눈은 ABC와 베이스캠프에 있던 다른 대원들을 뜬 눈으로 지새게 했다. ABC는 이날 새벽녘 결국 또 한 번 주저앉았다. 대원들이 스키스톡을 이용해 지지대를 여러 개 설치 했지만 눈무게를 스키스톡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지고 말았다.

ABC에 있던 서선화 대원이 재빨리 이상사태를 파악하고 나머지 대원들을 깨워 텐트를 일으켜 세우고 텐트 주변의 눈을 치우는 등 한바탕 법석을 떨어야 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식당 겸 회의실로 사용하는 대형 돔 텐트 폴이 부러졌다. 나머지 대원들이 자던 텐트 일부도 눈의 무게 때문에 무너져 내렸다.

결국 눈은 31일 정오를 지나서야 멈췄다. 이 사이 새집에 있던 대원들은 ABC로 무사히 귀환했고 같은 시각 박희영 대장은 베이스캠프로 돌아와 폭설로 인해 대폭 수정이 불가피해진 향후 운행일정 수립에 들어갔다.

nanga@osen.co.kr

<사진> 31일 오전 ABC의 4인용 텐트가 눈에 덮혀 있다. 눈은 발목을 넘어 허벅지까지 빠졌다. / 눈 속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유상범 대원. 이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물이 모자라 눈을 녹여 식수로 해결했다. / ABC 바로 앞에서 발생한 눈사태. 소규모라 큰 위험은 없었지만 이날 하루종이 탈레이사가르 인근은 눈사태 소리로 가득했다. / 베이스캠프에 피었던 꽃에도 눈이 내렸다. /원정대 제공.

출처 : 한국산악인, 악마의 성벽에 오르다(13)
글쓴이 : 황금거북(경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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